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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WEBZINE 2013.FALL

화제의 인물

김성수(대한성공회 주교), 목소리를 내지 않아도 울림이 큰 사람(글 : 이경주 기자 / 서울신문, 사진 제공 : 강화도 우리마을) 백발에 인자한 웃음이 촌장 역할을 하는 배우와 닮아서기도 하지만, 실제 그가 삶의 철학으로 ‘나보다 남’을 선택했고 평생 져버리지 않아서다.

뮤지컬과 영화로 만들어진 ‘웰컴 투 동막골’이라는 작품이 있다. 6·25 당시 강원도의 순박한 시골에 낙오된 남한, 북한, 미국 병사가 머물게 되면서 일어나는 해프닝을 다루었다. 주민들을 너무도 자애 롭게 다스리는 촌장(村長)에게 북한 병사가 묻는다.

“도대체 인민들을 이토록 잘 따르게 하는 위대한 영도력의 원천은 뭐요?”

“잘 멕여야지, 모.”

이 단순한 질문에는 내가 아니라 남을 먹이는 사람이 훌륭한 지도자라는, 평범해서 위대한 진리가 숨어 있다. 필자는 이 영화를 5번 이상 봤는데 그 때마다 이 장면에서 김성수(83) 대한성공회 주교를 떠올린다. 백발에 인자한 웃음이 촌장 역할을 하는 배우와 닮아서기도 하지만, 실제 그가 삶의 철학으로 ‘나보다 남’을 선택했고 평생 져버리지 않아서다.

김 주교는 지난 8월 11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하늘내린센터에서 열린 「제17대 만해대상」 시상식에서 평화대상을 받으면서 더욱 유명세를 탔다. 상을 수상한 후 그는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라고 말을 흐렸다. 김 주교는 “진정한 어르신들은 이제 다 돌아가셨다”면서 “김수환 추기경이나 함석헌 선생 등에 비하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전부터 그는 낮은 목소리처럼 늘 우리 곁에 있었다. 김 주교는 ‘목소리를 내지 않아도 울림이 큰 사람’, ‘언제나 평화스런 웃음으로 손을 내미는 사람’, ‘장애인들의 대부이자 우리 시대의 큰 스승’으로 불렸다.

2000년부터 8년 간 성공회대 총장을 역임할 때 김 주교의 별 명은 ‘식권 할아버지’였다. 밥 사먹을 여유가 빠듯한 학생이 있을까 싶어 주머니에 늘 식권을 넣고 다녔다. 학생들은 스스럼 없이 김 총장에게 다가와 식권을 받아 갔다. 또한 학교의 이념인 ‘열림, 나눔, 섬김’에 입각해 한 사람의 특별한 지도자보다 더불 어 살아가는 열 사람을 양성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우리 사회에 는 획일적인 질서에 집착하기보다 다양성을 즐길 수 있는 사람 이 필요하다는 믿음이었다.

30년 간 성공회 주교로 활동한 그는 은퇴 후에 자신의 조상에게서 받은 강화도 길상면 온수리 땅 3,000평에 정신지체장애인 재활 시설인 ‘우리마을’을 만들어 촌장(村長)으로 활동하고 있다. 우리마을은 1~3급 정신지체장애인이 일하고 생활하는 직업 재활시설이다. 콩나물, 고추, 버섯 등을 키워 ‘강화도 우리마을’브랜드로 납품한다. 우리마을’을 건설한 2008년, 통상 반대가 많은 정신지체장애인 시설을 건설하겠다는 그의 계획 앞에 인근 주민 그 누구도 항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2010년에 길상면 주민들이 주는 길상인상을 받았다.

이곳에서의 식사 전 기도 시간은 특별하다. 김 주교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우리는” 이라고 외치면 장애인들은 “최고다”라고 화답한다. 사회의 방치와 외면을 경험한 장애인들은 이 곳에서 찾아오지 않는 행복을 쫓기 보다는 김 주교와 함께 새로운 행복을 만들어간다.

그가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은 18살 때 폐결핵을 앓은 뒤였다. 배재중학교에 들어가 아이스하키 시합을 하던 도중 입에서 피를 쏟고 쓰러졌다. 폐결핵 3기였다. 이후 8여년 동안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요양을 했다. 34살의 늦은 나이에 목회자가 된 그는 다른 이들의 아픔을 알기 위해 탄광촌과 영산강 간척사업에 위장 취업을 했다. 직접 농사도 지었다. 장인어른이 물려준 90년 된 양복을 기워 입을 정도로 검소한 생활 역시 다른 이의 아픔을 나누는 행위다.

평생 봉사를 한 김 주교의 삶에서 부인 김후리다 여사를 뺄 수 없다. 김후리다 여사는 영국인으로 선교사 출신이다. 1973년부터 장애아 조기 교육과 장애아를 위한 장난감 도서관을 설립한 공로로 1999년 영국 왕실이 주는 사회공로상을 수상했다. ‘특수교육의 선구자’로 불린다. 또 우리나라에서 우경복지상과 세계성령봉사상을 받기도 했다. 김 여사는 신혼 시절 한국문화와 불교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 강화도 전등사에 머문 적도 있다.

김 주교가 장애인과 만난 것은 10년간 정신지체아를 위한 성베드로학교를 맡으면서다. 그는 “성베드로학교 교장과 우리마을 원장을 맡아10년 동안 정신지체장애인들과 생활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느님의 축복이자 행운”이라고 했다. 이후 정신지체 장애인들의 재활을 돕는 재활전문병원이 꼭 필요하다는 신념 아래 푸르메 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김 주교의 새로운 숙제는 우리마을에서 일하는 장애인들을 홀로 자립시키는 것이다. 3년 정도면 상추·콩나물 농사법을 배워 자립할 것 으로 봤는데 쉽게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일을 배우는 속도가 느려서라기보다는 우리사회가 아직 장애인을 받아들이는 데 인색한 면이 있어서다. 지난 3월 우리마을 개원 10주년 기념식에서 그는 가장 평범한 말을 남겼다

“소외된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시설들이 더욱 많아져 그늘진 곳이 더욱 밝아지기를 기대합니다.” 그가 씨앗을 뿌렸고, 이제 우리가 퍼뜨릴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