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WEBZINE 2014.SPRING

권두칼럼

나이듦의 지혜(이근후 / 이화여대 명예교수) “우리 집에 소가 없는데요?”

내가 치료하던 한 젊은이가 말했다. 이 대답은 나의 해석을 듣고 돌려 준 대답이다. 해석이란 환자의 이야기를 듣고 잘 간추려 환자에게 되돌려 주는 작업이다. 혼자 힘으로 간추릴 수 없는 환자에게 정신 치료 종결 단계에서 많이 사용하는 기법이다. 통찰을 길잡이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환자가 이 해석을 듣고 스스로 간추려 볼 수 있도록 돕는 목적으로 사용한다. 내가 돕고자 인용한 말은 속담이다. 대개 그 시대를 함께 살아온 사람이라면 속담이 비유하는 뜻을 공유하고 이해한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내용이 속담에 담긴다. 나는 그 환자가 일을 당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는 점을 알려 주기 위해 이런 속담을 인용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쳤구나’ 환자 생각에는 자기 집에 소가 없는데 느닷없이 치료자인 내가 소를 운운하니까 그런 대답을 한 것이다. 동문서답이다. 지혜를담은 속담의 은유적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점 때문에 그런 대답을 한다.

지혜와 지식

지혜(知慧)와 지식(知識)은 다르다. 지식이란 어떤 대상을 연구하거나 배우거나 또는 실천을 통해 얻은 명확한 인식이나 이해를 말한다. 이에 반해 지혜란 슬기를 말한다.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할 방도를 생각해 내는 재능을 말한다. 사전적 의미를 옮긴 것인데 언뜻 보기엔 차이를 인식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지혜와 지식은 무척 다른 것이다. 수로 말하면 지혜가 지식보다 고수다. 지혜는 지식을 능가한다. 물론 둘 다 끊임없는 연마가 있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지식이 누적된 학습의 결과라면 지혜는 통찰이고 이 통찰의 실현이다. 지식은 머리만 좋으면 쌓이게 되는 것이지만,지혜는 머리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지혜는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자무식이라도지혜는 있을 수 있지만 유식하다고 모두 지혜로운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의 인생 경험이, 그것도 환경에 잘 맞춰가며 어울려 살아온 경험이라면 바로 그것이 지혜일 것이다. 그래서 경험은 지혜의 나이테이다. 경험은 ‘지혜의 나이테’

지혜롭다는 것을 요즘 개념으로 말한다면 ‘적응의 달인’이 아닐까 생각된다. 적응(適應 Adjustment)이란 일정한 조건이나 환경에 맞추어 잘 어울리는 것이다. 심리학적 개념으로 전문화한다면 “생활환경으로부터의 요구를 효과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태도나 행동을 수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말이 그 말이다. 나이 든다는 것은 즐거운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나이 들면 즐거운 구석도 있다. 그 구석을 찾자면 지혜로움이 아닐까 생각한다. 오랜 세월의 인생 경험이, 그것도 환경에 잘 맞춰가며 어울려 살아온 경험이라면 바로 그것이 지혜일 것이다. 그래서 경험은 지혜의 나이테이다. 돌이켜 보면 지혜는 평탄할 때 경험하고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 환경이 어렵거나 고통스러울 때 그 열악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아니면 그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을 때 비로소 지혜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는 고통의 소산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지혜로운 속담은 소를 대책 없이 잃었다는 것을 나무라는 점도 있지만 앞으로 대비하여 소를 잃지 말라는 유비무환의 지혜를 일러 준 것이다. 소를 잃어버린 고통스러운 경험이 없었다면 이 지혜로움은 얻지 못했을 것이다.

지혜라는 선물

헤르만 헤세가 그의 저서 『싯다르타』에서 지혜를 언급한 대목이 있다. “지식은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어도 지혜는 전할 수가 없다. 사람은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 지혜롭게 살 수도 있다. 지혜에 몸을 의탁할 수도 있다. 지혜에 의해 기적을 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혜를 말하여 주거나 가르쳐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바로 지식과 지혜의 다름을 강조한 것이다. 지혜가 결국 경험이 축적된 열매라면 이 부분은 확실히 나이든 분들의 몫이다. 나이듦은 반가운 일은 아니지만 이런 지혜로움을 선물 받는다는 의미에선 나이듦의 즐거운 한 구석이다. 그러나 노인이란 생물학적으로 신체적 노쇠함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누구나 지혜를 갖지 못한다. 누구나 노인이 되지만 아무나 지혜를 갖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설령 지혜를 가졌던 분이라고 하더라도 신체적 건강을 잃거나 정신적인 건강을 잃음으로서 지혜마저 잃어버린 노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노인을 모신 가정은 길조가 있다(이스라엘).’‘집에 노인이 안계시면 빌려서라도 모셔라(그리스).’이 서양 속담들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노인이 경험을 통해 축적된 지혜를 온전히 보존하고 있어야 한다. 건강을 잃고 자리에 누워만 있다면 그 가정의 길조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노인은 자신의 지혜로움을 오래 간직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 그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의 신체와 정신 건강에 대한 유념일 것이다.

※ 필자는 신경정신과 전문의로서, 교수로서 50년 간 환자를 돌보고 학생들을 가르쳐왔다. 퇴임 후에도 아내와 함께 (사)가족아카데미아를 설립하여 가족 상담, 교육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나는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