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금의 사회를 백세사회라고 부른다. 혹자는 이것이 재앙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가져다준 인류의 축복이라고 한다. 그러나 재앙이니 축복이니 하는 감정적 반응을 넘어 백세사회가 우리 삶에 주는 현실적인 의미, 즉 우리의 생애에서 노인으로 보내는 시간이 가장 길다는 것, 따라서 노년기는 우리의 생애주기 중 가장 중요한 단계라는 의미를 직시해야 한다. 노년기의 행복도가 성공적인 인생의 척도가 되며 발전된 사회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인생의 굵직한 단계마다 우리는 잘 익은 결실을 맺기 위해 계획하고 준비하며 정성을 기울인다.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요즘 일각에서는 초등학교부터 포트폴리오를 쌓아야 한다고 하며, 대학에 진학하면 취업을 위한 실력을 배양하고 스펙을 쌓는데 4년을 오롯이 바친다. 취업을 하고 나면 결혼준비에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게 되어 만혼현상이 저출산의 원인으로 꼽힐 정도다. 사회의 경쟁이 격화될수록 ‘남보다 한발 먼저’라는 각오로 인생의 단계마다 열심히 준비하고 달려온 우리 국민은 그러나 궁극적으로 준비해야 할 최종 목적지 앞에서 멈추어 버린다. 2012년에 발표된 보험연구원의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자신의 노후준비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응답자 3,000명 중 74.4%였으며, 같은 해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실태조사 결과에서도 응답자 3,070명 중 72.7%가 노후준비 수준이 평균이하라고 응답했다. 청장년층의 절대다수가 생애주기 중 가장 길고 중요한 노년기를 행복하게 보내기 위한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노후준비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실제 국민들의 노후준비도가 낮은 이유는 보통 인간의 행동이 ‘미래’에 대한 대비보다 ‘현재’의 문제해결에 맞추어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즉 한국인은 과도한 교육열풍과 결혼풍습 때문에 30대에서 50대 후반까지 상당한 자원을 자녀에게 투자하지만, 기대와 달리 자녀의 취업과 독립은 늦어지고, 자신의 은퇴시기는 예상보다 앞당겨지면서 노후에 대한 준비 없이 불안한 노년기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노후설계는 때로 재무설계와 동일시되기도 하며 노년에 대한 준비로 제한되기도 하고, 보다 넓은 생애설계로 간주되기도 하나 아직까지 노후설계에 대한 공감이 부족하다. 설상가상으로 노후설계서비스에 직접 관여하는 주체들도 노후설계가 정확히 무엇인지, 그리고 그 가능성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 필자 또한 노후설계에 대한 연구를 거듭함에도 불구하고 줄어들지 않는 불확실성, 그에 반해 커지기만 하는 중압감을 경험해야 했다. 그래서 인지 보통 학계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누적되어 그 성과가 정책입안으로 연결되는 것이 수순이건만 노후설계의 경우 정책이 연구를 견인하고 있다.
국민연금공단을 중심으로
국가가 전 국민에게
체계적인 노후준비를
지원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2014년부터 정부와 국민연금공단을 비롯한 관계기관의 노력으로 지난 5월 29일 ‘노후준비지원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 법은 국민연금공단을 중심으로 국가가 전 국민에게 체계적인 노후준비를 지원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노후준비를 하는데 무슨 법까지 필요한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으나 돌이켜보라. 흑사병이 중세사회를 무너뜨렸듯, 증기기관의 발명이 산업화와 자본주의를 출현시켰듯 우리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고령화 사회에서 성공적인 노후설계는 오랜 역사를 통해 거듭해 온 또 하나의 패러다임 전환을 함축하고 있다. 고령화는 서구의 복지국가 모델에 경종을 울린 대표적인 ‘신사회 위험(new social risk)’이다. 서구 복지국가 모델은 물질적 욕구충족에 제한되었고 관료주의적·획일적이었으며, 복잡해진 정보사회에서 투입대비 산출이 비효율적이며 새롭게 등장하는 위험들에 무기력했다. 따라서 복지국가 이후의 새로운 복지 패러다임은 물질적 욕구 뿐만 아니라 질적이고 비물질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며 관료주의적이고 획일적인 산식에 의한 복지모형을 탈피해 개인에 대한 맞춤형 복지를 추구해야 하며, 복잡해진 정보화 사회에서 투입대비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정보를 제대로 전달하고 연계해야 하며, 새롭게 등장하는 위험들에 대한 대응력을 키울 수 있도록 미리부터 계획하고 관리하는 관점의 전환을 포함해야 한다.
그러나, 학계에서조차 새로운 복지모델에 대한 논의만 있을 뿐 아직 구체적인 상이 무엇인지 잡지 못하고 있으며 벤치마킹할 해외사례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눈 씻고 찾아봐도 구미에 맞는 사례는 찾을 수 없으므로 쉽지 않은 문제이다.
다만, 국민의 건강하고 안정된 노후생활을 지원하기 위한 ‘노후준비지원법’이 본회의를 통과한 현시점에서 물질 뿐만 아니라 비물질적 욕구를 충족하는 복지, 개인욕구에 대한 맞춤형 복지, 정보를 연계하고 전달하는 복지, 미리부터 계획하고 관리하는 복지를 위해 2008년부터 수많은 불확실성과 혼란 속에서 충분하지 않는 인력과 완벽하지 않은 콘텐츠이지만 국민의 노후준비를 위해 최선을 다해 노후설계 상담과 교육서비스를 제공해 온 국민연금공단이 그간의 경험으로 새로운 복지패러다임을 열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이소정 교수 _ 남서울대학교 노인복지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