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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인물

장미란, 세상을 들어올린 그녀 새로운 도전에 나서다(글 이경주 서울신문 기자 사진 대한역도연맹)

지난 1월 중순 '역도 여왕' 장미란(30)이 현역 은퇴를 공식 선언했다. 사실 그녀의 은퇴는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예견됐다. 전성기 때를 크게 밑도는 4위라는 기록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바벨을 손에서 놓친 후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바벨에 키스를 했다. 15년간의 세월을 내려놓는 모습이었다. 사실 그녀는 올림픽·세계선수권·아시안게임·아시아선수권 등을 모두 휩쓸며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개인적으로는 크게 아쉬울 것이 없는 은퇴다. 하지만 장미란은 늘 비인기종목인 역도의 미래를 고민했다. 또 국민들의 성원에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어했다. 런던올림픽 출전을 앞두고 인터뷰를 삼갔던 그녀는 그 이유를 이렇게 얘기했다.

“ 생각대로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스트레스를 받았고, 사실 그래서 인터뷰도 하기 싫었습니다. 국민들의 기대에 비해 내 상태는 형편없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금메달이 목표라는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죠. 몸이 아프다는 말은 핑계 같았고, 실망감을 안겨 드리는 것 같아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만 했었습니다.”

사실 필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비인기종목에 대해 올림픽 시기에만 관심을 갖는다. 금메달을 목에 걸던장미란의 영광스런 순간만을 기억하는 이유다. 하지만 그녀가 ‘로즈란’이라는 별칭을 얻은 것은 누구보다 힘든 과정을 거쳤고, 정직한 노력을 통해 능력을 꽃피웠기 때문이다. 최고의 자리에 있을 때에도 겸손함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 1997년, 역도장을 처음으로 찾아간 장미란은 말없이 돌아왔다. 남자보다 덩치가 크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던가 보다. 그렇게 좋아하는 밥에 숟가락도 대지 않았다. 예쁜 옷을 입고 피아노 학원을 다니며, 공부도 좀 하던 장미란에게 당연히 충격이었다. 하지만 역도 선수 출신인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큰 덩치에도 달리기와 멀리뛰기에 소질이 있었다. 부모는 딸이 훌륭한 역도 선수가 될 거라고 믿고 있었다. 부모는 밀어붙였다. 가세가 기울었던 1990년대 말 부모는 몇 년간 곰탕집을 했다. 다섯 식구는 식당에 딸린 단칸방에서 함께 생활했다. 고등학생 장미란은 역도 훈련을 마치고 집에 오면 바로 곰탕 그릇을 날라야 했다. 설거지와 청소도 도맡아 했다. 새벽 2시에 문을 닫고서 야 식당 주방에서 몸을 씻을 수 있었다. 그녀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장미란은 이때의 기억에 대해 “나는 늘 가장 좋은 국물을 먹을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잘 먹도록 해주셨다. 많이 먹지 못하면 잔부상도 많다. 100점짜리 아빠였다.”고 회상했다. 힘든 가세는 오히려 가족애를 키웠다. 장미란은 역도의 길로 들어선 것에 불평하지 않고 훈련에 매진했다. 바벨을 잡은 지 한 달도 안 돼 출전한 중학생 대회에서 1위를 했다. 선수는 2명이었지만 역도에 대한 재미를 느낀 계기였다. 이후 2년 만에 성인 무대를 제패했다. ‘천부적’인 역도선수라는 호평이 줄을 이었다.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에서는 은메달을 받았다. 장미란은 국내에서 2003년부터 10년 연속 일반부 3관왕을 차지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여자 역도 최중량급(75kg 이상급)에서 세계기록(326kg)으로 금메달을 따며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얻었다. 국민들에게 장미란이라는 이름이 각인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장미란이 꼽는 최고의 경기는 다르다. 그녀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2007년 태국 치앙마이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이 가장 짜릿한 승부였다고 답한 바 있다. 치앙마이 세계선수권은 베이징올림픽을 1년 남겨놓고 열렸다. 경기의 승패에 따라 올림픽에 대한 자신감을 얻을수도 있고 잃을 수도 있었다. 특히 2006 도하 아시안게임 때 중국 선수 무솽솽에게 져서 은메달에 머물렀기 때문에 우승에 목말랐다. 이 대회에서 장미란은 인상 138㎏와 용상 181㎏를 기록해 합계 319㎏로 무솽솽과 동률을 이뤘다. 하지만 약간 적은 체중 탓에 우승을 했다. 이후 5년간 세계정상을 지키면서 장미란은 늘 겸손한 모습으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배려와 베풂은 그녀에게 ‘로즈란’이라는 별칭을 안겼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선행을 자연스레배웠다. 그녀가 다니던 초등학교에는 유난히 부모 없는 아이들이 많았다. 장미란의 어머니는 그녀의 생일잔치 때마다 부모 없는 아이들만 초대하라고 했다. 저녁을 먹이고 목욕까지해서 보냈다. 우유를 구입해 가난한 가정에 보내기도 했다. 살림이 넉넉한 것과 상관없이 남을 도울수록 자신도 풍요롭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어린 장미란은 배웠다. 장미란의 제2의 인생은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 운영으로 시작될 예정이다. 그녀는 지난해 2월 ‘장미란재단’을 설립해 이사장직을 맡았다. 이 재단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꿈을 키우는 비인기스포츠 선수들을 육성하는 것이 목적이다. 교육 프로그램, 스포츠멘토링 프로그램 등을 운영한다. 이용대(배드민턴), 유승민·김경아(이상 탁구), 김재범·송대남(유도), 이정수·이호석·조해리(이상 쇼트트랙), 남현희·정진선·최병철(펜싱), 황경선(태권도), 정지현(레슬링) 등 국가대표 전현직 선수 26명이 멘토로 참여한다. 장미란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에도 도전할 계획이다. 장미란재단의 선한 뜻을 펼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진행 중인 박사과정도 마칠 계획이다. 장미란이 역도에 빠져든 가장 큰 이유는 ‘기록을 통한 정직한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약간의 오차는 있지만 내가 땀 흘린 만큼 시합 때 결과가 나타난다. 훈련량이 절대 거짓말을 안 하는 운동, 심판의 판정 논란이 없는 아주 깔끔한 운동이다.”고 말했다. 어쩌면 우리는 금메달리스트가 아니라 정직하게 노력한 결과를 정직하게 얻어가는 아름다운 장면들에 감동했는지 모른다. 그녀는 ‘은퇴가 아쉽지 않냐’는 질문에 “정점을 찍으면 그 자리에서 내려오기 싫은 게 당연하겠지만, 그것 역시 하나의 과정이라 봐요.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군림할 수도 없고, 나만 최선을 다한 게 아니라고 자연스럽게 생각됐어요.”고 말했다. 그녀는 역도의 정상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풍요로운 인생의 정상으로 오르려 한다. 그녀는 다른 누군가의 등을 밀어줄 것이다. 또 다른 로즈란이 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