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바이러스>의 음악감독이자 드라마 속 ‘강마에’의 실제 모델. 서희태 지휘자는 대중과 호흡하는 클래식을 꿈꾸는 사람이다. 최고의 연주는 관객의 열렬한 호응으로 완성된다고 굳게 믿는다. <오페라 스타>, <스타킹>등 예능 프로그램 출연도 그런 이유였다.
클래식은 어렵다?
클래식은 어렵다는 말도 어렵지 않다는 말도 모두 100%의 진실은 아니다. 작은 관심에서 시작해 하나씩 배워가며 들으면 그토록 풍부하고 아름다운 세계가 또 없다. 헌데 어떤 이에게는 영 지루하고 막막한 벽처럼 느껴진다. “실력을 쌓아 최고의 연주를 들려주면, 과연 그걸로 되는 걸까?” 서희태 지휘자는 늘 고민했다. 전문가와 대중 사이에는 분명 보이지 않는 경계가 있는 것 같았다. ‘클래식을 들어야 지식인’이라는 오해도, 그렇다고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클래식을 ‘학습’으로 대하는 것도 모두 안타깝기만 했다. 고민을 이어가던 어느 날 그는 운명적 순간을 만난다. 멘델스 존 <한 여름 밤의 꿈>의 ‘결혼행진곡’을 지휘하던 중, 등 뒤로 느껴지는 기운이 의아할 정도로 좋았던 것. 돌아보니 관객들의 얼굴에 눈부신 미소가 빛나고 있었다. “모르는 곡을 들으면 저 조차 긴장을 해요. 대중에게 익숙한 곡을 연주하니 다들 긴장감을 버린 거죠”
우리나라 사람들은 클래식의 곡명과 지휘자, 연주자 등을 외워가며 들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정규 교육 과정의 음악 수업에서 암기식 시험을 치기 때문이다. “곡명을 외우지 않고 그저 음악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고, 음악에 저절로 감동해 자연스레 정보를 찾아보게 되는 게 진짜 음악을 즐기는 방식이에요. 즐거움을 참지 말고 표현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보겠다는 열망이 점점 커져갔어요”
놀라운 변화, 놀라온 콘서트
이후 서희태 지휘자는 쉽고 재미있는 클래식 공연을 기획하는 일에 매달렸다. 관객이 오케스트라와 함께 호흡하며 즐기도록 하기 위해 우선 선곡이 관건이었다. 전문가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일반 대중이 사랑할 만한 곡을 골라야 했다. 곡에 따라 연주자가 연기나 춤을 하면 더 좋을 것 같았다. 하나 하나 변화를 주다 보니 ‘놀라온 콘서트’의 모양이 만들어져갔다. 확신도 있었다. ‘어렵고 지겹다’는 문턱 하나만 넘으면 그 다음은 일사천리라고 믿었다. 음악의 환희를 제대로 느껴 본 사람은 계속 그 맛을 찾게 된다는 걸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한편 그에게는 자신이 사랑하는 클래식을 대중도 사랑하도록 이끌고픈 바람 외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예술은 천재가 존재하는 분야예요. 배움과 연습, 물론 중요하지요. 하지만 타고난 재능은 어디서도 얻어올 수가 없어요. 제가 죽도록 한다고 해서 클라우디오 아바도나 정명훈 급이 될 수 있겠어요? 하지만 대중친화적인 클래식에는 재능도 흥미도 있지요. 사람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늘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놀라온은 ‘놀다’라는 단어와 즐겁다는 뜻의 우리말 ‘라온’의 합성어다. 클래식을 가지고 놀아보자는 계획, 대중이 클래식 안에서 즐겁게 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명명이다. “오케스트라들 사이에 실력의 차이만 존재하는 건 의미 없어 보였어요. ‘남다름’이 필요하다고 여겼죠. 드라마틱하게 입장을 하면 어떨까? 검정 정장에서 벗어나 컬러풀한 옷을 입어도 보자, 뮤지컬처럼 만들고, 관객들과 대합창도 시도하자. 콘트라베이스를 장난감처럼 빙그르 돌려보자. 이런 식으로 아이디어가 샘솟았어요.”
그는 연주자들이 엄숙하게 연주만 하는 게 아니라 곡에 따라 표정과 포즈에 변화를 주고, 때로 춤도 추기를 원했다. 하지만 혁신은 늘 벽에 부딪힌다. “언제나 혁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수만 개를 찾을 수 있어요.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단원들은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여러 개 들어 완강히 반대했다. 서희태 지휘자는 6개월에 걸쳐 설득을 했다. 지난 8년 간의 신뢰, 그리고 ‘딱 한 번만 변화해보고 아니면 말자’는 말에 단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침내 연주회를 마친 날, 평소라면 악기 들고 급히 귀가했을 연주자들이 서 지휘자를 찾아 “예쁜 옷 입은 기념으로 함께 사진 찍자”고 다가왔다. 일어나서 춤추고 연주에 맞춰 박수 치는 관객에게 연주자들도 크게 감동한 결과였다. 오케스트라와 관객 사이의 공명이란 공연을 완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란 사실을 진심으로 느낀 날이었다.
타인의 소리를 들으며 조화를 이루는 중용의 미학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악기들은 각기 소리의 질감, 연주법 등이 다르다. 많게는 100명이 넘는 단원들은 개성도 다 다르다. 음악인들의 성격이 워낙 예민해 단원끼리 사이가 좋지 않은 경우도 흔하다. 아름다운 하모니를 위해 조화와 협력이 필요한데, 당연히 그것은 꽤 쉽지 않다.
“우리나라는 개개인이 도드라지는 것을 두고 못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너무 잘나도 너무 못나도 안 되고 딱 평균이어야 하지요. 그러나 오케스트라는 모든 악기가 평균이면 절대로 안 돼요. 모든 연주자가 뛰어나되, 다른 악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자신을 눌러야 할 때가 있지요. 예컨대 트럼펫이 자기 부분을 불 때 오보에와 멜로디는 숨을 죽이지요. 즉 개성을 살리되 내가 나설 때와 아닐 때를 잘 알아야 합니다. 개인적 감정을 숨기고 공동의 목표 하에 협업해야 하고요. 그러한 ‘중용’의 상태를 만드는 게 지휘자의 일입니다. 개인의 목소리들이 다양한 이 시대에 오케스트라 리더십이 강조되는 이유기도 하고요”
지휘자의 악기는 지휘봉이 아니라 오케스트라 단원
서희태는 ‘지휘자의 악기는 지휘봉이 아니라 오케스트라 단원’이라 말한다. 단원의 역량은 지휘자에게 절대적이다. 거장 지휘자라고 해도 아마추어 연주단을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리긴 쉽지 않다. 그가 리더와 멤버와의 팔로우십을 강조하는 까닭이다. “번스타인이 만년에 빈 필하모니를 지휘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경이로워요. 팔짱을 끼고 가만 서서 연주자들과 눈을 마주쳐요. 호흡이 얼마나 잘 맞으면 눈빛만 보고 마음을 읽을까 싶지요” 그는 리더는 물을 채우는 저수지가 아니라 물이 저절로 흐르도록 하는 강물이 돼야만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물이 흘러 흘러 모든 국민들의 마음에 다다르기를 바란다.
“아무리 고가의 스피커라도 공연만큼의 감동을 주지는 못합니다. 공연장에 와서 클래식을 들으며 스스로의 영혼이 고양되는 것을 느껴보길 권합니다. 세상이 비록 각박하지만 음악을 들으면 나를 보살피고 도닥이는 느낌을 받을 수 있거든요. 특히 오케스트라 연주에는 삶의 진리와 치유책이 있습니다. 멜로디는 모든 악기에 고르게 분배돼 있으니 바이올린, 트럼본, 튜바 등 누구에게나 단 한번은 주목받는 시기가 오지요. 세상과 상황을 탓하지 말고 자신의 역할에 묵묵히 최선을 다하자는 것, 그러다 보면 재능을 꽃피우는 시간이 꼭 온다는 사실을 오케스트라가 알려주는 겁니다.”
취재·글 _ 김은성 사진 _ 황성은